제 21회 수상작 바이올린 켜는 여자

글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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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고 싶다

자꾸만 거창해지는 쪽으로

끌려가는 생을 때려 엎어

한 손에 들 수 있는 작고 단출한 짐 꾸려

그 여자 얇은 아랫턱과 어깨 사이에

쏙 들어가는 악기가 되고 싶다

왼팔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내 몸의 현들을 그녀가 천천히 긋고 가

노래 한 곡 될 수 있다면

내 나머지 생은 여기서 접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연애하고 싶다

그녀의 활에 내 갈비뼈를 맡기고 싶다

내 나머지 생이

가슴 저미는 노래 한 곡으로 남을 수 있다면

내 생이 여기서 거덜 나도 좋겠다

바이올린 소리의 발밑에

동전바구니로 있어도 좋겠다

거기 던져 주고 간 몇 잎의 지폐를 들고

뜨끈한 국물이 안경알을 뿌옇게 가리는 

포장마차에 들러 후후 불어

밤의 온기를 나누어 마신 뒤

팔짱을 끼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 수 있다면

제 21회 당선자 도종환 사진

당선후기

도종환(사진) 시인은 수상 소감에서 “시를 쓰며 사는 삶이란 결국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이다. 유리가 없으면 시가 없다”며 “문학 아닌 것을 향해 빠져드는 삶, 부재만이 실재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멱살 잡혀 끌려가는 삶을 때려 엎고 싶었다. 한 편의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면 여기서 그만 멈추고 싶었다.‘바이올린 켜는 여자’는 그 생각을 옮겨 적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가림 시인(인하대 명예교수)은 심사평에서 “‘바이올린 켜는 여자’는 구체적이고 촉각적인 이미지의 구사를 통해 사랑의 실체를 날렵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평했다.